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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E.H 곰브리치)

2. 영원을 위한 미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by 2mokpo 2023. 1. 18.

2 영원을 위한 미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지구상 어디에나 어떤 형태로든 미술은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서의 미술 역사는 남프랑스의 동굴 속이나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상스러운 기원들과 지금의 우리 시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전통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약 5천 년 전의 나일 강변의 미술을 가옥이나 포스터와 같은 우리 시대의 미술과 연결시켜주는, 즉 거장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그 제자로부터 추종자 또는 모방자에게로 전해내려오는 직접적인 전통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의 거장들은 이집트 인들에게서 배웠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 인의 제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의 미술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집트가 역사의 먼 지평선 위에 마치 풍화된 이정표처럼 서 있는 돌의 산, 즉 피라밋 (도판 31)의 나라임을 알고 있다. 그 피라밋이 제아무리 유구하고 신비스럽게 보일지라도 그것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직 한 사람의 왕의 일생 동안에 이 거대한 돌의 산을 쌓아올릴 수 있게 했던 철저하게 조직화된 나라에 관한 이야기와 많은 노동자들과 노예들이 강제로 여러 해 동안 돌을 뜨고, 그것을 공사장으로 끌어 운반하며, 무덤이 왕의 시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 돌들을 짜맞추게끔 할 수 있었던 부유하고 강력했던 왕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판31 <기자의 피라미드>, 기원전 2613-2563년경

도판32. <석회석 두상>, 기원전 2551-2528. 기자의 한 고분에서 출토, 높이 27.8 cm, 빈 미술사 박물관

고왕국의 제4왕조인 피라밋 시대의 초기 초상들 중에는 이집트 미술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들(▲도판 32)이 속해 있다. 이 작품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그런 엄숙함을 지니고 있다. 이집트의 조각가들은 초상화를 부탁한 사람에게 아첨을 하거나 덧없는 표정을 보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본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이외의 사소한 세부는 모두 생략해버렸다. 아마도 인간 두상(頭像)의 기본적인 형태에 대해 이처럼 엄격하게 집중했기 때문에 그 초상들이 그만큼 인상적인지도 모른다.

이 기하학적인 규칙성과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의 결합은 모든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형성한다. 우리는 무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와 회화에서 이런 점을 제일 잘 연구할 수 있다. 사실 장식이라는 단어는 죽은 사람의 영혼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만들어진 미술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도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옛날, 아주 무시무시하고 까마득한 옛날에는 세력자가 죽으면 그의 하인과 노예들을 그의 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 후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너무나 잔인하고 사치스럽다고 생각되었을 때 미술이 그 구원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지상의 세력자들에게 진짜 하인들 대신에 그 대용물로서 하인들의 형상을 주었다

 

이러한 부조와 벽화들은 수천 년 전에 이집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에 관해서 대단히 생생한 그림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실생활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전함이었다.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미술가의 과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우연한 각도에서 보이는 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도판33 <네바문의 정원>, 기원전 1400년경, 테베의 고분 벽화, 64 x 74.2cm, 런던 대영박물관 34 <헤지레의 초상>, 기원전 2778-2723년경, 헤지레 묘실의 나무로 된 문의 일부, 높이 115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판34. <헤지레의 초상>, 기원전 2778-2723년경. 헤지레 묘실의 나무로 된 문의 일부, 높이 115 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머리는 옆으로 보일 때 가장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옆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눈을 생각할 때는 대개 정면에서 본 것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면에서 본 눈이 얼굴의 측면 그림에 그려져 있다. 신체의 상반신, 즉 어깨와 가슴은 정면에서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래야만 두 팔이 몸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과 다리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측면에서 그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사람이 그처럼 이상하게 평면적이고 왜곡되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집트 미술가들은 모든 사물이 가장 특징적인 각도에서 그려져 있다. 도판 34는 이러한 관념이 인체의 표현에 적용된 결과를 보여준다. 우리가 인간의 눈을 생각할 때는 대개 정면에서 본 것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면에서 본 눈이 얼굴의 측면 그림에 그려져 있다. 신체의 상반신, 즉 어깨와 가슴은 정면에서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래야만 두 팔이 몸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과 다리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측면에서 그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사람이 그처럼 이상하게 평면적이고 왜곡되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양쪽 발을 시각화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엄지 발가락으로부터 위쪽으로 연결되는 발의 분명한 윤곽선을 그리기를 더 선호했다. 그래서 두 다리는 안쪽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이 부조에 나오는 사람은 마치 두 개의 왼쪽 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의 미술가들이 인간의 모습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인간의 형태 속에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다 그려넣게 만든 규칙을 따랐을 뿐이다.

이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마술적인 의도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원근법으로 단축되거나 잘려나간 팔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죽은 사람에게 필요한 제물을 받거나 또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이집트 미술은 미술가가 주어진 한 순간에 무엇을 볼 수 있었느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나 장면에 대해 그가 알고 있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았다.

이집트 미술가가 그의 그림 속에 구현한 것은 단지 형태나 모양에 대한 그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 형태들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지식이기도 했다. 영어에서 우두머리를 ‘big boss'라고 하듯이 이집트 미술가는 우두머리를 그의 하인이나 그의 아내보다 더 크게 그렸다.

상형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은 그가 누구였으며 생존시에 어떤 지위와 명예를 누렸는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명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바닥에 파피루스가 깔려 있는 강, 물새들이 모여 있는 웅덩이, 늪과 개울울 가로질러 배를 타고 가면서 그는 쌍갈래 창을 가지고 30마리의 물고기를 잡았다. 하마를 사냥하는 날은 얼마나 유쾌한가." 그 아래에는 물속에 빠진 사람을 그의 동료들이 건져 살렸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문 주위의 명문은 죽은 사람에게 재물을 바쳐야 할 날짜를 기록하고 또한 신들에게 바치는 기도들이 포함되어 있다.

도판35 <크눔호텝 묘실의 벽면>, 기원전 1900년경, 베니하산 부근, 1842년 카를 렙시우스가 출판한 <유물(Denkmaler)> 삽화

도판37 <나무 위의 새들>, 도판 035의 부분, 니나 맥퍼슨 데이비스가 원화를 본떠 그린 그림

도판38 죽은 자의 심장의 무게를 재는 일을 감독하고 있는 자칼 머리 모양의 신인 아누비스와 그 결과를 기록하는 따오기 두상의 전령신인 토트, 기원전 1285년경, 죽은 자의 고분에 안치된 두루마리 그림인 <사자의 서>에 나오는 한 장면, 높이 39.8 cm, 런던 대영 박물관

도판39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기원전 1360년경, 석회석 부조, 높이 14cm, 베를린 국립미술관, 이집트관

이집트 미술의 가장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조각, 회화, 그리고 건축의 형식들이 마치 한 가지 법칙에 따라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집트 양식은 대단히 엄격한 법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미술가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 한다. 좌상의 경우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야 하며, 남자의 피부는 여자의 피부보다 더 검게 칠해야 한다. 모든 이집트 신들의 모습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하늘의 신인 호루스(Horus)는 매나 매의 머리 모양으로 그려야 하며, 장례의 신인 아누비스(Anubis)는 자칼이나 자칼의 머리모양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문자 필기를 배워야한 했다. 그들은 상형문자의 형상과 상징을 명확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돌에 새길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규칙들을 완전하게 터득하면 수습 생활은 끝난다.

 

아무도 그가 배운것과 다르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그에게 독창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과거에 추앙을 받았던 기념비들과 가장 비슷한 조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미술가로 간주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3천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기간 중에 이집트의 미술은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유일하게 이집트 양식의 철칙들을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집트가 파국적인 침략을 받은 후에 건설된 신왕국으로 알려진 제18왕조 시대의 왕이었다. 아멘호테프 4세로 불리어지는 이 왕은 이단자였다. 그는 오랜 전통에 의해서 숭상되어온 많은 관습들을 타파했다.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신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아톤으로 그는 이 신을 숭배했고 그를 태양의 모양으로 그리게 했다. 그가 화가들에게 그리게 했던 그림들은 그 신기함으로 인해 그 시대의 이집트인들을 놀라게 했음이 틀림없다. 그 그림들에서는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하나도 볼 수 없고 대신에 그가 태양의 신 아톤의 축복을 받으며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그들의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는 모습(▼도판 40)으로 그려져 있다.

도판40 <딸들을 안고 있는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 기원전 1345년경, 석회석제단 부조, 32.5 x 39cm, 베를린 국립미술관, 이집트관
도판41 <단검>, 기원전 1600년경. 미케네 출토, 청동에 금과 은과 흑금으로 상감, 길이 23.8 cm,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도판42 <파라오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기원전 1330년경.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된 왕좌의 일부, 나무에 금박과 채색,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아크나톤의 후계자는 투탕카멘인데 많은 보물들이 들어 있는 그의 무덤이 1922년에 발견되었다. 이들 중 어떤 작품들은 여전히 아톤 종교의 현대적 양식을 띠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특히 가정적인 목가풍의 배경 속에 왕과 왕비를 그려놓은 왕좌의 뒷면(▲도판 42)이 그러하다. 그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자세는 엄격한 이집트의 보수주의자들을 아연실색케 했을지도 모른다. 이집트 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의자에 기대고 있는 자세이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그보다 작게 그리지 않았으며 그녀의 손을 공손히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다.

 

18왕조 시대에 왕이 이러한 개혁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이집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덜 엄격하고 굳어 있지 않은 외국의 작품들에 주의를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섬나라인 크레타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의 미술가들은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미술의 이러한 해방은 오랫동안 계속되지는 못했다. 이미 투탕카멘의 통치 시대에 옛 종교가 다시 부활되었고 외부 세계로 열린 창문은 다시 닫혀 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테마가 소개되고 새로운 작업이 행해졌지만 미술의 업적에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새롭게 보태진 것이 없었다.

'아마도 이 민족들은(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처럼 인간의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가려면 육체와 그 형상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메르 족이라고 불리는 한 민족이 고대 도시 우르를 통치했던 상고 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도록 모든 가족들과 노예들을 함께 매장했었다. 이 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어 현재는 대영 박물관에서 이 고대의 야만적인 왕들이 그들의 왕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고도로 세련된 미술적 솜씨가 원시적인 미신이나 잔인성과 공존할 수 있었는지 볼 수 있다.

도판43 <하프>의 부분, 기원전 2600년경. 나무에 금박과 상감, 우르에서 출토, 런던 대영 박물관

도판44 <국왕 나람신의 기념비>, 기원전 2270년경. 수사 출토, 돌, 높이 200 cm, 파리 루브르

도판45 요새를 공격하는 아시리아 군대>

 

'이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거기에는 이 처참한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들 중에 아시리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오래된 미신, 즉 그림 속에는 그림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미신의 지배를 그때까지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부상당한 아시리아 병사들을 그려 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