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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시간 --/읽다가·서평 모음

살아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

by 2mokpo 2014. 7. 15.

살아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
이 즈음은 온갖 식물들이 여느 때보다 왕성하게 양분을 키우는 때입니다. 지금 숲에는 봄꽃에 비해 눈에 띄게 화려한 빛깔과 모양으로 피어나는 여름 꽃이 한창입니다.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난 숲에서 누구보다 신이 나는 건 벌과 나비입니다.

꽃 송이 앞에 코를 들이박으려 다가서면 꽃송이 가운데에 숨어서 꿀을 빨던 큼지막한 벌이 ‘위잉!’ 하며 튀어나와 놀라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꽃송이 근처에는 언제나 벌들의 윙윙거림이 소란스럽습니다. 한창 피어난 피스툴로사모나르다 Monarda fistulosa L. 꽃 송이에도 가까이 다가서려면

조심해야 합니다. 노동과 식사를 훼방받는 벌이 달려들지 모르니까요.

 지난 몇 차례에 걸쳐 <나무편지>에서 서울 수송동 백송, 서울 조계사 회화나무, 서울 잠실 뽕나무, 서울 선농단 향나무, 서울 신림동 굴참나무와 같은

서울의 큰 나무를 보여드렸습니다.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 서울의 나무를 한 그루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처연하게 지켜내며 살아남은 통곡의 나무가 오늘의 나무입니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 자리, 그 중에서도 사형장에 서 있는 한 많은 미루나무 한 쌍입니다. 하! 참.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우리 말 가운데에 ‘통곡’이라는 참혹한 언어를 이름으로 가진 슬픈 운명의 나무입니다.

 이태 전 KBS-TV 의 ‘6시 내고향’의 한 코너인 ‘나무가 있는 풍경’에 출연하여 직접 진행하던 때에 소개했던 나무 가운데에 대전 중촌동 아파트 단지의

‘평화의 나무’가 있습니다. 때를 정확히 기억하기 어려운데, <나무편지>에서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그 대전 평화의 나무를 생각하면 거의 반드시 함께

 떠오르는 나무가 바로 서울 통곡의 나무입니다. 두 나무가 심어진 곳과 때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두 나무 모두 일제 식민지 시대 초기에 심은 나무이며, 일제가 지은 감옥 터에 자리잡고 자라온 나무입니다. 하나는 1908년에 지은 경성 감옥,

다른 하나는 그보다 11년 뒤에 지은 대전 감옥이지요. 물론 나무에 대한 기록이 따로 남아있지 않아,

감옥의 어느 위치에 무슨 이유로 언제 심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나무 모습을 보아 대략 비슷한 나이,

즉 100년 쯤 된 나무로 보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겁니다. 나중에 서대문교도소로 이름을 바꾼 경성감옥의 나무는 미루나무,

대전교도소로 이름을 바꾼 대전감옥의 나무는 왕버들입니다

대전 평화의 나무에 얽힌 기가 막힌 사연은 여기에서 함께 이야기하기에 자리가 모자랍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를 약속드리고, 우선 서울 통곡의 나무부터 보지요. 통곡의 나무는 서대문교도소 사형장 터의 입구 바깥 쪽에 한 그루, 그리고 담장을 사이로 하고, 바로 안 쪽에 한 그루, 그렇게 두 그루의 나무를 가리킵니다.

두 그루는 같은 미루나무이고, 같은 시기에 함께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그루의 자람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형장 바깥에 서 있는 나무는 큰 키로 자랐지만,

사형장 안에서 사형수들의 비명과 고통스런 표정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나무는 턱없이 작습니다.

그냥 나무에 닿는 햇살의 양이 적었다고 이야기하면 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바로 앞에서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며 사라져야 했던 사형수들을 바라보며 나무라고 어찌 평안하게 잘 자랄 수 있었을까요?

필경 나무도 다른 살아있는 누군가와의 교감을 원하는 생명의 본능을 가진 분명한 생명체입니다.

생명과의 교감을 원하는 생명체가 생명을 마감해야 하는 다른 생명을 바라보며 어찌 큰 키로 자랄 수 있었겠느냐 말입니다.

더구나 그 때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쳐 싸우다 억울하게 죽어간 독립운동가들이었으니 더 그랬겠지요.

통곡의 나무를 바라보며 쓰다 보니, 대전 평화의 나무 뿐 아니라, 교수대의 운명을 띠고 살아야 했던 서산 해미읍성 호야나무도 함께 떠오릅니다.

해미읍성 호야나무 역시 제 본성처럼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역시 억울한 죽음을 바라보며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이지요. 나는 분명 믿습니다.

나무는 결코 홀로 살아가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서 고통 받는 또다른 생명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건 우리가 살아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너구리라는 이름의 태풍이 이곳에선 순하게 지나갔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겠지요. 이미 너구리 다음 태풍인 람마순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좀 먼 곳으로 지나가리라 예상됩니다만, 분명 어느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날들이 될지 모릅니다.

누구라도 큰 탈 겪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작은 희망이 곧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분명한 외침이 되리라 믿습니다.

-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의 생명을 떠올리며 7월 14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