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상식적 질문에 답을 하라

by 2mokpo 2013. 11. 26.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지난 대선을 불법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여당은 사회 혼란을 불러오는 ‘불순세력’, ‘종북 신부’들이라고 맹공을 퍼붓고 있다.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도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말을 인용해 “국정원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선거에 개입했다”고 보도했다.

<제이티비시>(JTBC)의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들 반수 이상은 이번 국정원 댓글 사건이 직원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 개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더라도 지난 대선 국면에서 여당·국정원·국방부·국가보훈처 등이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조직적으로 공조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 정부의 청와대·국정원·법무부는 검찰의 수사를 차단하고, 선거 개입이 공무원 개인의 일탈인 양 몰아가려 하고 있다.

공무원과 군인이 상부의 명령 없이는 그 어떤 독자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의 반인 군대 갔다 온 남성들과 공직에 몸담은 적 있는 수백만의 국민들에게는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직무범위를 벗어나는 이 민감한 일에 어찌 겁없는 공무원들이 부서 단위로 움직이겠는가?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이승만 정권의 수족은 경찰이었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과 합작하여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모든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의장을 선출하지 않으면 일본과 공산당에게 나라를 뺏긴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며 공무원의 선거 개입을 지시·정당화했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대통령 직속 기관의 장이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종북좌파 세력들이 국회에 다수 진출하는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활개치고 있다”,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면 강에 처박아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3·15 부정선거 당시 마산 학생 시위대를 경찰이 발포·사살하여 큰 논란이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모른체하면서 ‘지각없는 사람들의 선동’이라고 공세를 폈고,

최인규는 마산사건이 ‘공산폭동과 흡사’하다고 협박성 발언을 했다. 당시 현지 조사단도 “불순세력의 선동이 확실하다”며 국가범죄를 덮으려 했다.

이 정부는 어떤가?

국정원은 이 사건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언록을 들추어내는가 하면 국정원 직원들에게 묵비권 행사를 지시했다고 하고,

하필이면 이때 이석기 등 내란음모 사건이 나왔다. 더욱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려 했던 채동욱·윤석열 두 책임 검사는 도중하차했다.
과거의 최인규는 대통령에게 충성한 전형적인 기술관료였다. 그는 이승만 당선이 나라를 잘살게 하는 일이라고 변명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역시 관료 출신이다.

그가 과연 대통령 국정수행 지원이 국가안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그런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공조를 한 다른 국가기관도 ‘애국충정’에 자발적으로 움직였나?
과거 정권이 약점을 잡혔을 때 언제나 그랬듯이 이 정부와 여당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신부들을 종북으로 몰고 있다.

이 정부가 애초에 엄정하게 사건을 처리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왔겠는가?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선거의 공정성이 무너진 사실이 명백해 보이는데,

비판하는 국민을 모조리 종북·불순으로 몰아서 사건을 덮자는 이야기인가? 수많은 희생을 거쳐 이룩한 민주주의가 이제 1950년대 말 수준으로 후퇴할 지경이다.
정부는 국민들의 상식적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3년 11월26일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