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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없는 말까지 지어낸 ‘정상회담 발췌본’

by 2mokpo 2013. 7. 2.

없는 말까지 지어낸 ‘정상회담 발췌본’
국가정보원이 만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은

 하나의 새로운 ‘창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없는 말을 더하고, 있는 말은 빼고, 의미는 비틀었다.

자극적인 표현은 키우고, 전후 맥락은 건너뛰고,

입맛에 맞지 않는 발언은 남김없이 잘라냈다.

이렇게 탄생한 발췌본은 애초의 대화록과는 전혀 다른 느낌,

다른 의미를 갖는 ‘괴물’이 돼버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을 “나”라고 호칭했는데도

발췌본에는 “저”로 둔갑돼 있는 것은 대표적인 예다.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이라고 말한 부분에도 새로 ‘님’자를 넣어서

“김정일 위원장님”이라고 바꾸어놓았다.

마치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극존칭을 쓰며

머리를 조아린 것처럼 조작된 그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단순한 오타”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도대체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은 글자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제대로 타이핑도 하지 못하는 한심한 조직이란 말인가.

이런 중대한 오타가 발생했는데 아무도 잡아내는 사람이 없는 무능한 조직이라면

존재할 이유도 없다.

변명을 하려면 좀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냈으면 한다.

국정원은 애초부터 작심하고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기 위해 발췌본을 만든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5월 발췌본을 만들 때부터

“6·15 및 10·4 선언의 문제점을 대내외에 전파하여” 따위의 정치적 목적을 분명히 했고,

여기에 박근혜 정부 국정원은 ‘왜곡의 화룡점정’을 가했다.


발췌본의 가장 근본적인 왜곡은

서해 북방한계선(엔엘엘)과 관련된 발언이다.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 구상 등 엔엘엘 긴장완화 방안의 앞뒤 문맥을 잘라버리고

 “엔엘엘은 국제법적 논리적 근거가 분명치 않고” 등

자극적 발언만 부각시켰다.

원문에 나오는 “엔엘엘 가지고 이걸 바꾼다 어쩐다가 아니고

그건 옛날 기본합의서 연장선에서 협의해 나가기로 하고” 등의 발언은 완전 실종돼 버렸다.


국정원의 이런 악의적인 짜깁기 편집과 축약은 중대한 범죄행위다.

정상회담 발언 문제로 나라가 이처럼 극심한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시발점도

바로 왜곡된 발췌본이었다.

누가 ‘악의적인 오타’를 냈는지부터 시작해 철저한 경위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필요하다.

새누리당도 이성을 되찾기 바란다.

 애초 발췌본을 보고 흥분했다면

이제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엔엘엘 포기나 굴종·비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실에 눈감고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것은

발췌본 왜곡 편집 못지않은 추악하고 비열한 행위다.

20130702 한겨레신문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