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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시간 --/모셔온 글 모음, 어록

이 대통령의 천국과 지옥

by 2mokpo 2010. 8. 31.

지난 며칠간 국회에서 진행된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은 생각이 하나 있었다.

흠집투성이 후보자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하느니 차라리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인사청문회에 세우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불온한 상상이었다.

인사를 하고 나면 으레 뽑힌 자뿐 아니라 뽑은 자도 심판대에 오르는 법이다.

후보자의 도덕성, 능력, 경륜의 평가결과는 발탁한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은 항목의 점수로 환산된다.
그동안에도 이 대통령의 인사점수는 낙제점 이하를 맴돌았지만 이번에는 아예 구제불능 수준이었다.
부적격자들이 몽땅 단체로 입장했으니 이는 선수 차원을 떠나 감독의 문제다.
차라리 총감독을 불러내 인사 기준과 판단 근거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 든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회심의 카드로 꺼낸 8·8 개각은 결국 ‘세 명 한날 동반퇴장’이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허망한 결말을 맺었다.
정치적 속성재배의 대상으로 화려하게 뽑혔던 김태호씨에게 영예는 순간이었고 상처는 길고도 깊어 보인다.
창피만 당하고 무너져내린 신재민씨, 아까운 쪽방 하나만 날릴 처지인 이재훈씨도 애초 아니 발탁됨만 못하게 됐다.
낙마를 한 것은 세 사람만이 아니다. 집권 후반기 트랙을 호기롭게 질주하려던 이 대통령도 어이없이 말 등에서 떨어진 형국이다.
부상 정도로 치면 오히려 이 대통령이 세 사람보다 심할 수도 있다.
체면과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앞날을 헤쳐나갈 방도는 난감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뼈저리게 자책하고 있을까.
그동안 관찰해온 이 대통령의 행태에 비춰보면 별로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아마 야당과 언론 탓, 자기방어를 제대로 못한 후보자 탓을 하며 절치부심하고 있을 공산이 더 크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숙지하고 있어야 대중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매우 시니컬한 이야기지만 정치지도자라면 한번쯤 새겨들을 만한 경구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자신이 천국으로 가려고 하는 바람에 대중을 지옥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 대통령에게 지옥이란 무엇인가. 바로 레임덕이다.
그럼 천국은? 권력의 누수를 막으면서 자신의 뜻대로 후계구도를 정리하고 정권재창출까지 이루는 과업일 것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치고 천국의 유혹에 솔깃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측근들로 권력 주변에 높은 울타리를 치려 한다든지,
자신의 말을 잘 들을 만만한 사람을 ‘월반’시켜 차기를 관리하겠다고 한다든지,
기회가 닿으면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까지 해보겠다는 야무진 욕심 따위가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나 정국타개 방식은 그를 정치에 발탁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무척 닮아 있다.
여권 내에 대통령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인사가 유력한 대선주자로 존재한다는 것부터,
8룡이니 9룡이니 하는 대선주자군을 관리해 ‘포스트 엠비’를 준비하려는 모습도 엇비슷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역사가 잘 말해준다.
한때 정치 8단, 9단 소리를 듣던 고수들도 넘지 못한 벽을 이 대통령이 넘본다는 것부터가 미안한 이야기지만 무망해 보인다.
레임덕은 헤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오히려 더욱 깊이 빠져드는 늪과 같다.
그래서 레임덕을 피하려 하지 말고 차라리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는 길이 상책이라고 고언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대통령에게 이런 얘기는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그리고 늪에 한발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미 친이세력마저 공공연히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한나라당의 공기는 심상치 않다.
그리고 여권 안의 내출혈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여기서 수군대고 저기서 반발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견디기 힘들다.

한겨레 2010년 8월31일자 아침햇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