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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 사조 명화/바로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by 2mokpo 2023. 1. 11.

 

16~17세기 독일 태생의 화가이자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렘브란트와 함께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역동적인 구성, 탁월한 인체 묘사, 극적인 표현력, 생생한 색감 등

초상화와 풍경화, 종교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

그의 영향력은 렘브란트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여러 왕가의 궁정 화가로 활동했고 인문적 소양이 깊었고,

외교관으로도 활동하며 당시 유럽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주로 성경, 신화, 인물 등을 소재로 해서 그렸으며,

유명한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처럼 그도 든든한 후원자들의 지원 아래,

자신의 화실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부족함 없이 풍족한 화가 생활을 영위했다.

생전 2,000여점이 넘는 많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매에 떴다하면 고가에 낙찰되는 작품이 많은 인기 화가다,

유독 여인들을 살 찐 모습으로 그리는 걸로 유명하다.

53살 때 16살 소녀와 결혼하기도 했던 16살 아내의 초상화도 그렸는데,

그 여인도 살집이 넘치는 걸로 봐서 원래 뚱뚱한 여성들을 좋아했던 듯싶다.

이 시대 미의 기준이 살찌고 풍만한 체형을 선호했다는 거야 익히 잘 알려있지만

동시대 다른 화가들 기준으로 봐도

루벤스의 여성상은 유달리 뚱뚱하다.

병으로 34살의 나이에 일찍 보낸 첫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도

풍만한 체형으로 그려진 걸로 보아 취향이었던 건 확실하다.

페터 파울 루벤스, <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1627-8년경. 대형 제단화를 위한 습작, 목판에 유채, 80.2x55.5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회화관

루벤스는 카라치와 그의 유파가 고전적인 전설과 신화를 그림의 주제로 그리는 것을 부활시키고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감동적인 제단화를 구성한 방법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카라바조가 자연을 연구할 때 보인 타협없는 성실성 또한 높이 평가했다.(…) 루벤스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 전통적인 주제를 얼마나 자유자재로,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다루었는지를 보려면 이 그림들을 다시 한번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얼핏 보아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즉 이 그림에서는 앞의 예로 든 어떤 그림에서보다도 더 많은 움직임과 빛, 그리고 훨씬 공간감이 넘치고 있으며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서양 미술사 397~398쪽

*페터 파울 루벤스, <아이의 얼굴>, 1616년경. 목판에 붙인 캔버스에 유채, 33x26.3cm, 파두츠 리히텐슈타인 왕실 소장품

작은 소녀의 얼굴인데 아마도 루벤스의 딸인 것 같다. 이것은 구도상의 복잡한 기교도 없으며 화려한 의상이나 흘러내리는 빛도 없는 단순한 소녀의 정면 초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숨을 쉬고 맥박이 고동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과 비교해보면 그 이전 시대의 초상화들은 예술 작품으로서는 제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어쩐지 실물과 거리가 멀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서양 미술사 400 쪽

*페터 파울 루벤스, <자화상>, 1639년경. 캔버스에 유채, 109.5x85cm, 빈 미술사 박물관

루벤스에게 그 이전의 어떤 화가도 누려보지 못한 명성과 성공을 거두게 만든 것은 거대하고 다채로운 화면을 손쉽게 구성하는 천부적 솜씨와 그 속에 활기가 충만하게 떠돌 수 있게금 하는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재간과의 조화에 있었다. 그의 예술은 궁정의 사치와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러한 왕족들의 권력을 미화하는 데 대단히 적합했다.(…) 귀족임을 암시하는 검을 차고 있는 그의 자화상은 그가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매서운 눈매에는 자만심이나 허영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예술가였다. 서양 미술사 401~402쪽

페터 파울 루벤스,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 1629-30. 캔버스에 유채, 203.5ㅌ298츠, 런던 국립 미술관

 

우의화는 보통 다소 따분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루벤스의 시대에는 그것이 사상을 표현하는 편리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가 그런 그림의 하나인데 이것은 루벤스가 스페인과의 화평을 설득하고자 영국 국왕 찰스 1세에게 선물로 가져갔던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평화의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루벤스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의 작품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성질 때문일 것이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화’된 형태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형태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가 그린 남자와 여자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중략) 인생에 대한 환의야말로 그의 작품들을 화려한 바로크 풍의 단순한 실내 장식으로 타락시키지 않고 미술관의 차디찬 공기 속에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걸작품으로 남아 있게 만든 것이다. 서양 미술사 403~405쪽

〈인동덩굴 그늘에서의 루벤스와 브란트〉, 캔버스에 유채, 1609, 178×136.5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이 작품은 1609년 결혼한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이사벨라 브란트(Isabella Brant, 1591~1626)와 자신의 모습을 함께 담은 것이다. 그림의 배경이 된 인동덩굴은 행복한 결혼을 암시하는 식물로, 당시 루벤스의 삶을 짐작하게 해준다.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 캔버스에 유채, 1638, 176×83cm, 오스트리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1626년 첫 부인 브란트가 지병으로 세상을 뜬 뒤 루벤스는 3년여를 쓸쓸히 지내다가 열여섯 살 밖에 안 된 어린 신부 엘렌 푸르망(Hèléne Fourment, 1614~1673)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 당시 루벤스의 나이는 무려 쉰세 살이었다. 사교계의 많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도 불구하고 루벤스는 어린 아내를 극진히 아꼈고 또 작품에 아내의 모습을 담았다. 이후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와 비너스는 엘렌의 얼굴을 많이 닮았다. 엘렌의 여체를 풍만하게 그린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은 그가 각별히 아끼던 작품이었다.

페터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림」,1611~1614, 목판에 유채물감, 421 × 464㎝, 벨기에 안트베르펜, 성모 대성당

이 작품에는 베네치아의 풍부한 색채부터 카라바조의 극적인 빛과 고전 조각의 완벽한 근육까지 여행에서 배운 교훈으로 가득하다.

중앙패널은 축 쳐진 그리스도 시신 주위에 서로 엉켜있는 한 무리의 인물들을 보여준다. 십자가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중심으로 해, 니고데모의 왼쪽 아래에 있는 세 명의 마리아의 위로 향한 팔까지 이어지는 사선은 놀라울 정도로 역동적이다. 모든 인물은 예수의 시신을 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순간의 슬픔과 감정도 공유하고 있다.

그림 양쪽 날개부분에 묘사된 장면은 언뜻 보아 ‘십자가에서내림’과 연결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도상학적으로 서로 관련돼 있다.

이 제단화의 바깥쪽 패널에는 화승총 사수 조합의 수호성인 성 크리스토퍼가 등장하는데, 크리스토퍼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품은 자’를 뜻한다. 십자가에서 내림(중앙), 방문(왼쪽),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봉헌(오른쪽)의 세 장면은 모두 예수의 육체가 떠받쳐지거나 뱃속에 들어있는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애도>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숫자는 작품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는데,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가 1612년경에 그린 <애도>에서는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십자가 곁에 있었던 네 사람만 묘사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그림 중심에는 돌아가신 그리스도가 계신다. 하얀 아마포로 감싸인 그리스도의 몸은 벌써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고 있다. 루벤스는 그림 한가운데 있는 예수님 옆구리의 상처를 강조해서 그렸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묽은 피가 흘러나오는데, 플랑드르 출신인 루벤스는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성경 말씀을 참고하여 묽은 피로 표현했다. 예수님의 몸은 제대처럼 보이는 석관 위에 깔린 밀짚 위에 놓여 있다.

이는 밀떡이 성찬 전례를 행할 때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는 가톨릭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

아마포를 감싸고 예수님의 어깨를 받치고 있는 젊은이가 바로 사도 요한이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답게 붉은 옷을 입고 있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깊은 명상에 잠긴 눈빛과 자세이다. 바다와 같은 검푸른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 안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빛은 죽은 아들의 얼굴빛처럼 흙빛으로 물들었고, 눈가에는 피눈물이 가득한데, 성모는 울부짖는 것 같다. 성모 뒤에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도 눈물을 흘리긴 마찬가지다. 그녀는 돌아가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늙은 남자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이 그림은 생명수에 대한 어머니의 자비로운 모습을 상징하는 작품 입니다

원래 이 그림의 주제는 로마시대에 작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ᆢ기념될 만한 행위와 격언들 에서 그림의 주제를 잡았지요늙은 남자와 젖을 먹이고 있는 여인과의 관계는 부녀지간 입니다. 즉 ᆢ아버지와 딸 ᆢ입니다

응ᆢ? 이럴수가ᆢ? 이게 어찌된 상황이지ᆢ? 그림을 보겠습니다

화면 배경에 보이는쇠사슬과 손이 뒤로 묶여 있는 남자는 그가 죄인임을 말해 줍니다

몪여진 두손ᆢ벽에 단단히 매어둔 쇠사슬, 시몬이란 남자가 역모죄로 옥에 갇혀 온힘을 다해 젖을 빨고 있고 자신의 오른쪽 젖을 아이가 아닌 아버지에게 먹이고 있는것을 부끄럽게 여겨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여인이 딸 페로 이다.

시몬은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아사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혀있는 죄인이다 ㆍ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된 착한 딸ᆢ페로ᆢ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구할 방법은 자신의 젖을 먹이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 했다ㆍ그녀는 매일 매일 아버지를 면회해 자신이 가지고있는 생명수인 젖을 먹였다ᆢ

이런 딸의 효심에 감동한 왕이 시몬을 옥에서 풀어주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이 주제가 대단한 인기였는데 자식이 부모를

공양하는 가장 고귀한 사례로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그렸졌다가 중세에 사라졌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그려진 이 그림을 카르타스 로마나 ᆢ즉 로마인의 자비 라고 일컬었다.

성모 무염시태